배양태박사.6.25전쟁에 학도병으로 미25사단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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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양태박사.6.25전쟁에 학도병으로 미25사단과함께
  • 엄우식 기자
  • 승인 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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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경기북부관광발전위원회 사무총장의 부친
학도대장 임명장
 
▲ 배양태박사

[동두천.연천=엄우식 기자] 학도호국단은 1949년 3월 8일에 창설되었는데 광주 서중 4, 5학년때 배양태는 정익성 서중학교장의 지명으로 광주서중 학도호국단장이 되었다. 사상을 떠나 학생들을 이끌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다. 이 때부터 배양태는 민주주의의 리더로서뿐만 아니라 사상을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리더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공산주의 학생들이 많은 관계로 찬탁운동이 우세했으나 배양태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탁학생운동을 벌이면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학교에서나 경찰관서에서 공산주의 학생들을 제압하도록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최용호라고 광주농고에서 주먹으로 힘을 잡고 있던 반공학생이 있었는데 남노당측에서 총을 쏘아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었다. 내가 알기로는 암살로 반공학생을 주도하던 리더중 3~4명이 광주에서 죽었던 것 같다.

공산주의 학생들이 민주주의 학생들을 테러를 해서 입원도 하고 서로 죽고 죽이는 극한투쟁을 했다. 그러나 반공학생은 학교측과 경찰에서 적극 지원하고 반대로 공산주의 학생은 잡아가자 전세는 반공학생들에게 유리해지면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가하다

1950년 당시 서중학교 6학년시절 배양태는 서중학교 학도대장에다가 학련위원장으로서 학생들의 진정한 리더였다. 6월 25일 북한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이 땅은 처절히 유린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괴뢰군이 남침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우리들은 7월초순까지 학교에 등교했었다. 7월 17일 광주서중 학도대대장을 맡고 있던 정현성군이 학교에 나와 괴뢰군이 장성까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광주상업학교 학도대장 정영환(사망)군에게 들었다고 알려주었다.

그 때 광주에 미군이 개입을 했으니 광주까지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을 주장하던 파와 미군이 아니라 미군의 할아버지가 와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인민군의 사기를 꺽을 수가 없다는 의견을 주장하는 파로 나뉘었는데 총도 없는 우리는 일단 부산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호국단 간부들은 정익성 교장에게 달려가 임시휴교토록 요청을 하는 한편 50여명이 모여 일단 광주에서 철수키로 결의했다.

이 때 배양태는 민주주의 학생들의 가족들을 위해 공산주의 학생들을 서중학교 숙직실에 모아놓고 “3개월후에 북한군은 광주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 학련생들의 가족들을 괴롭힌 자는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왔을 때 우리 학련생들의 가족이 무사하다면 너희들의 가족들도 무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3개월후 광주로 돌아올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우리가 떠난 후 약 일주일 뒤인 7월 23일에 인민군이 광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때 중도우파로서 “나야 별 일 없겠지. 공산당 빰 한번 때린 적도 없고 평화적으로 했는데 왜 건드리겠어.” 라고 말하며 피난을 가지 않은 사람들은 인민군들에 의해 학살을 당했었다. 반공진영은 모두 한마음으로 퇴각을 하였고 공산진영은 남아서 득세를 했으나 중도파는 광주에 남았다가 모두 사살을 당했다.

전쟁에 참여할 생각을 하고 학생들과 부산에서 만나기로 하고 공산주의 학생들을 피해 7월 19일 배양태는 썬그라스에 중절모자를 쓰고 광주역까지 골목골목으로 숨어서 간 후 당시 무안출신 국회의원 장홍엽씨와 함평출신 국회의원 서 상규씨 등과 같이 태극호 2등호를 타고 부산에 동행을 하였다. 다른 학생들도 부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뿔뿔이 헤어져 각자 숨어서 부산까지 갔다.

부산에 도착한 배양태와 정현성 대대장은 경남도청에 모여 호국단원들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신문에 광고를 냈다. 장영식 감찰부장, 임영득 문화부장, 조귀현 훈련부장 등 동지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모두 50여명이나 모였다. 정익성 교장도 만나 비분의 눈물을 뿌렸다.

우리는 곧장 임시간부회의를 열고 전투에 참가키로 결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군들과 힘을 합해 광주를 탈환키로 굳게 맹세했다. 배양태와 동지들은 혈서를 써 들고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자 육군 제5사단장인 이응준 소장에게 찾아가 입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학도병 수백명이 모여 싸울 수 있게 총을 달라고 5관구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이응준 소장을 찾아가 애걸을 하자 이응준 소장은 눈물을 흘리면서 “일선으로 보낼 총도 없다. 5관구에는 총이 없다. 하물며 어떻게 너희들에게 총을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우리들의 간청을 듣던 이 소장은 우리의 진지한 표정을 보더니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25사단 킹 소장에게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미25사단은 남해안과 호남지구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美25사단에 입대만 하면 고향을 되찾는데 우리들의 힘을 아낌없이 쏟을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부대였다.

우리는 킹 소장을 만나 ‘우리들은 군번도 필요없다. 다만 군복과 총만 주면 선봉이 되어 싸우겠다. 그리고 광주를 탈환한 즉시 군을 떠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며 우리들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부산에서 라디오와 대자보를 통하여 학련학생들을 소집해서 경남도청에서 의기투합을 한 후 배양태는 미25사단에 가서 킹소장과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학생으로서 군번을 원하지 않는다. 둘째, 계급장도 원하지 않는다. 셋째, 총과 칼을 우리에게 주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 광주를 수복한 후 제대를 시켜주기 바란다.” 이를 수락한 킹 소장은 트럭 3대를 보내어 광주, 전남에서 부산으로 온 학련학생들을 미 25사단에 참여시켰다.

킹소장은 우리들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美제25사단이 부산에 군트럭을 보내 동지들을 수송해왔다. 우리들은 美제25사단 수색중대에 소속됐고 칼빈소총과 M2를 지급받았다. 이중에는 김 종곤소위가 통역장교로 배속되었고 정진곤 소위, 김남섭 소위 등이 학병들을 입속시켰다. 우리들은 마산시 현리에서 괴뢰군들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이응준 소장의 소개로 만난 킹소장의 휘하로 들어가 총과 식량을 공급받으며 군번과 계급이 없이 괴뢰군들과 싸울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는 부산 구덕산에서 훈련을 받았다. “두시간동안 M1총 280발 전부 쏘아라. 바로 최전방으로 나간다.”는 교관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군번도 없이 최전방으로 나가야 했었다.

이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우리들에게도 진격명령이 내렸다. 우리들은 현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중리거주주민들을 모두 피난시키고 결전의 시기를 기다렸다. 어느 날 석양무렵 주민들이 피난가고 없는 중리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수색조 A팀에 속해있던 정현성군이 발견했다.

배양태는 수색조 B팀에 속해 있었다. 정군과 우리 동지들은 엄폐물을 이용하여 마을까지 접근했다. 연기가 올라오는 집을 향해 집중사격했다. 얼마쯤 뜸을 들인 후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니 괴뢰군 세 명이 즉사를 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괴뢰군 한 면이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 동지들은 소련제권총과 소총을 노획하고 부대로 개선했다.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을 전후해서는 더욱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었다. 우리가 주둔하고 있던 현리와 중리에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투가 벌어졌다. A팀 수색조장인 시네스 상사는 현리 고갯길에서 점심을 먹다가 적의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중리수색작전에서는 김동준이 괴뢰군의 저격을 받아 얼굴, 팔 등에 관통상을 입었고 장영식도 지뢰 파편에 맞아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다.

마산전투가 가장 치열

11월 2일 우리부대는 진주남강작전에 투입됐다. 패해서 도망을 가던 괴뢰군들이 미처 후퇴하지 못 하고 남강건너편에 집결해 있었다. 우리 학도병들은 이 때에도 수색중대의 최선봉을 맡았다.

마산을 떠나 진주에 들어가기 전 나와 우리 동지들은 아군과 적군사이에 끼고 말았다. 주위엔 칠흙같은 어둠이 깔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포탄이 비오듯 했다.

배양태는 동지들에게 날이 밝으면 깨워달라고 말한 후 잠에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운명을 하늘에 맡긴 채 아침에 눈을 떠 보니 10m앞에 포탄을 맞고 즉사한 미군의 시체가 보였다. 순간 눈이 아찔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신이 돌보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전투에 참여했다. 우리들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괴뢰군들과 맞섰다. 적들은 박격포탄을 비오듯 쏘아댔다. 남강도하작전이 시작됐으나 물이 허리까지 차오른데다가 탄우가 쏟아져 정신이 없었다.

이 전투에서 킹소장이 가벼운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삼일간 버티던 적들을 섬멸하고 우리들은 10월초순 전남남원에 진주했다. 곳곳에서 괴뢰군들과 맞부딪쳤으나 그 때마다 학병동지들의 희생없이 적을 섬멸하면서 고향을 향해 진격했다. 남원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들은 괴뢰군들의 포로가 되어 있던 미군 30명을 구출해냈다.

괴뢰군들은 도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지 포로들을 방치해 두고 있었다. 남원에 있던 괴뢰군들의 야전병원에 들어서니 그들 부상병들의 살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들은 주민을 안심시킨 후 곡성을 향했다. 곡성에서 하루를 지내고 마침내 광주를 향해 진격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석양무렵 군통신차가 광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칠팔명의 동지들과 함께 달려갔다. 그러나 겨우 한 사람밖에 탈 수가 없어 광주진격을 일단 포기했다. 이날밤 군통신차는 괴뢰군의 집중포격을 받고 박살이 나 버렸다.

간신히 목숨을 구한 운전병이 이 비보를 전해 주었다. 우리들은 경찰들과 힘을 합해 괴뢰군을 향해 진격했다. 10월 3일 마침내 정현성 동지를 비롯한 우리동지들은 광주에 입성했다. 감개무량했다.

학도병들의 희생과 헌신 속에 광주를 되찾은 우리들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들은 광주를 수복하고 난 후에도 적의 잔당을 소탕하는데 나섰다. 담양군 용면 추월산에 숨어 있던 적들이 월동준비를 위해 광주근교까지 습격해오곤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경찰들과 함께 이들을 깡그리 소탕을 했다.

어느 정도 치안이 유지되자 우리들은 군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당초 고향을 되찾으면 제대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던 우리들은 제대를 했다. 6.25동란 당시 학도병들의 희생은 비교적 컸었다. 그리고 건국초기 찬탁세력들과 좌익세력들을 쳐부수었던 학도호국단원들의 피해도 컸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6.25사변이 일어난 후 전국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데 전투에 의한 사망자만 15만에 이르고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20만명, 부상자가 25만명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화를 입은 사람은 수백만에 이르고 북한공산군도 이루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배양태도 진주남강작전에서 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쏟아지는 포탄속에 잠을 잘 수 없는 상태에서 잠깐 눈을 감으면 옆에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배양태도 언제 자신이 죽을 지 모르는 상태였다고 한다.

아침이 되자 총성이 멈추고 남강은 강빛조차 붉게 변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결국 진주는 탈환되었고 배양태는 광주까지 동료들과 진격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곳곳에 숨어있던 공산군들과 빨치산의 기습으로 광주까지 가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배양태와 학생들은 남강작전을 비롯하여 광주를 수복할 때까지 정찰부대원으로서 최전선에 나서 싸웠다. 광주를 떠난 지 3개월이 안 된 9월 28일 배양태의 말대로 광주를 수복하게 되었고 학생들은 학업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양태가 타기로 되어있던 트럭이 떠나려는데 사람들이 많이 타 있어 배양태는 가방을 먼저 친구에게 주며 “ 먼저 가서 어머니에게 가방을 전해주길 바란다.” 고 부탁하고 후에 트럭을 타고 가는데 먼저 떠난 배양태의 가방을 실은 트럭이 전남 곡성에서 공산군의 습격을 당해 트럭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가방도 트럭과 함께 불타버렸다.

이 때 배양태가 타고 있는 줄로 알았던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 배양태가 타고 가던 트럭이 습격을 당해 불타버렸고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라고 말을 전해서 배양태의 가족들은 배양태가 전사한 줄 알았는데 며칠 후 살아서 돌아오자 천운이 따라서 배양태가 살았다고 학련동료들이 마을어귀에 ‘배 양태, 장 영식 전쟁에서 살아오다.’ 라는 현수막을 걸고 귀환을 축하했다.

이에 배양태는 동료들을 모아서 전쟁에서 희생된 동료들과 사람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공산군들을 설득하여 자수하게 하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원서 배양태 박사님을 기억하며

배양태 박사님 이력

1950년 2월 光州西中學敎 學徒隊長 任命.1950년 10월 미 25사단 從軍.대한의사협회 한국의정회장

국제 LIONS 협회 309K지구 총재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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