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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유적]충장공 정발장군묘(忠壯公 鄭撥將軍墓)경기도 미산면 백석리 산34-1 에 위치
정박사 전문기자  |  jdh51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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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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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충장공 정발장군묘(忠壯公 鄭撥將軍墓 1553∼1592)는 경기도 미산면 백석리 산34-1 에 위치한 경주정씨 제실의 서북쪽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해발 150m가량의 9부능선에 동향(東向)하여 위치하며 부인 풍천 임씨(豊川任氏)와의 합장묘이다

   
▲ ▲ 왕의 피난과 전열정비의 시간을 벌어준 충장공 정발장군의 묘(忠壯公 鄭撥將軍墓)
봉분은 원형으로 기저
부에 높이 40㎝의 백색화강암 호석 20매를 둘렀으며 규모는 직경 394㎝, 높이 150㎝이며 여러 석물이 있었으나 도굴과 훼손되고 새로 건립한 상석과 향로석, 무인석, 망주석 등이 있고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나 소실되어 1982년 다시 비를 세웠다.

묘역입구에는 장군을 따라 순절한 애향과 그녀의 여종인 용월 등의 사적비가 있는데 이는 1982년 양경공 사적비와 함께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고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이며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해남 현감, 거재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 4월13일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적이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인 부산진으로 쳐들어 왔고 이 전투는 임진왜란때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로 정발의 지휘하에 실제 병력 1,000명 규모의 군관민이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음날 성이 무너지고 정발장군도 4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유품(옷과 갓)만 수습하여 의관장을 치렀고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부산의 충열사와 안낙서원에 제향되고 있으며 1683년(숙종9)에 마을 입구에 정려문이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겨 했고, 과묵하여 선비의 풍모가 완연하였다. 특히 소학에서 얻은 바가 많고, 자라면서 그 형과 같이 독행인으로 뽑혔다 하니 그 행실이 얼마나 돈독하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약관에 이미 사서와 오경을 통독하였으며, 아울러 손오병법에도 통달하였다.

 

부산진성의 항전은 처절했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수하다가 죽어 갔다. 정발도 결국 적의 총탄을 맞고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무인답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성을 베개 삼아 호국의 귀신이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전황과 정발의 공적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발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증직이 있었고, 숙종 7년에는 다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장이라 내렸으며, 그 자손을 녹용토록 하였다.


정발은 군사를 격려하며 싸웠지만 분하게 조총에 맞아 전사 하였다고 한다. 정발장군은 검은 옷을 즐겨입어 정발장군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함께 죽은 소첩 애향과 종 용월은 부산의 동구 좌천1동 정공단에 합사되어 제사가 올려지고 있으며, 열녀 애향은 충렬사 의열각에도 모셔져 추모의 향화가 끊이지 않고 있다.

또, 1766년(영조 42년) 부산청사 이광국이 순절지인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에 정공단을 세워 기일에 향사하고, 동래 충렬사에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다대진첨사 윤흥신과 함께 춘추로 제향하여 그의 넋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일본제국시대에 민족 혼을 일깨운다 하여 몰수되었던 비석을 되찾아 광복 이후 새로 만들어 세운 것과 함께 현재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매년 정공단 보존회 주체로 음력 4월 14일 제향을 맡고 있다.

 



성 안의 사람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성민이 모두 죽음으로 항전했기 때문에 왜군들은 보복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까지도 모두 죽여 버렸던 것이다. 때문에 이 부산진 전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한 자는 전화를 기적적으로 모면한 사람과 당시 공격에 참여한 왜인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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