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평행선 '갑'과 '을'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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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평행선 '갑'과 '을'의 관계
  • 동두천.연천신문
  • 승인 201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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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익 정치평론가,본보컬럼위원

이병익 컬럼위원
남양유업 사태로 사회 이슈화된 '갑'의 횡포와 갑에 의해서 불이익을 받거나 권리를 침해당한 '을'의 무기력한 대응을 두고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국민들은 갑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대응을 하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는 을에 대한 동정여론이 일어나고 있다.

'갑'과 '을'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는 법전이나 성문적인 정의서가 없지만 국민은 통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갑은 우월적 지위에 있어 무한권리를 행사하는 강한 자이고 을은 수세적 지위에 있어서 수동적이고 약한 자로 인식하고 있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고 권한을 넘어 방종을 일삼는 갑에 대한 분노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을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도 있다. 그러나 '갑'과 '을'의 관계가 영원할 수 없고 갑이 언젠가 을이 되고 을 또한 언젠가 갑이 되는 상황을 본다면 무조건 갑은 나쁘고 을은 좋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논리적으로는 다수 대중이 '갑'이 되고 소수 계층이 '을'이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소수가 갑이 되고 다수는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갑이 되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보통의 노력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서 갑의 입지에 서려고 하는 것이다.

갑의 위치는 특별히 명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어떤 경우는 갑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을이 되기도 한다. 이슈화 된 남양유업이 대리점에 대해서는 갑의 입장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거래처에 대해서는 을의 위치가 되기도 할 것이다. 갑의 위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을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갑의 지시나 부탁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고 들어준 수많은 을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한 이유는 생존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갑에 대해서 불만이 없었거나 협조한 을이 있었기에 갑의 횡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다고 본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로 이루어 졌던 과거 역사가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통해서 대등한 관계로 이루어 냈으며 지금은 노동자들이 갑의 위치에 있을 만큼 지위가 막강해졌다.

과거 정치사에서 다수 여당은 늘 갑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수 여당이라고 해서 갑이 될 수 없고 소수 야당이라고 해서 을이 될 수 없는 현실을 보고 있다. 오히려 소수 여당이 수퍼 갑의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갑과 을의 관계는 사안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갑, 을의 구분이 없는 대등한 위치에 올라 있는 모두가 갑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 갑이 을이 되기도 하고 을이 갑이 되는 시대가 평등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다. 세상에는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는 것이 이치이다.

'갑'이라고 믿고 있던 대기업이 이제 국민들의 지탄을 받으면서 '을'의 지위로 급전추락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결국은 갑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갑, 을의 관계로 사회현상을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처음부터 갑의 위치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을의 위치에서 부단한 노력으로 갑의 위치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갑과 을은 치열한 경쟁관계나 적대관계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협조관계로 가야 마땅한 것이다.
우월적 지위의 갑의 횡포는 을의 반란으로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음을 알고 갑은 을을 배려하고 을은 갑을 이해하는 기본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갑의 입장에서 을에게 폭언을 퍼부은 그 사람도 지금은 을보다 못한 처지에서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에 만연된 갑, 을의 관계를 법적으로 끊을 수 있는 고리도 아니고 현실적이고 심리적인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갑과 을의 상부상조의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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