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작전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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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작전을 아는가?
  • 동두천.연천신문
  • 승인 2013.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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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익 본보 컬럼위원,정치평론가

 

올해가 6.25 발발 63주년이고 12월 24일이 흥남철수작전 완료 63주년이기도 하다.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장진호전투에서 필사적으로 중공군을 막아내던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7사단과 한국육군 1군단 휘하의 수도사단과 3사단의 병력 105,000명과 17,500대의 차량과 35만 톤의 전쟁 물자를 철수하는 작전이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미 10군단 사령관인 아몬드 중장에 의해 이 작전은 계획되고 시행 되었다.

그러나 이 작전계획은 틀어졌다. 흥남부두로 밀려온 피란민 10만여 명의 생사에 목숨을 건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과 아몬드 장군의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는 민간인을 태우고 갈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고 이에 동조하는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 대령이 있었다. 아몬드 군단장은 피난민도 함께 철수할 것을 결심하고 탈출할 배를 모으기 시작했다.

민간유조선인 메르데스 빅토리호는 승선 가능인원 2000명을 7배 초과한 14000명을 태웠고 버지니아 빅토리호 14,000명, 레인 빅토리호 7,000명, 일본상선 마다게쯔호 6,000명, 요니야마호 3,000명, 미 해군LST함 수십 척, 동해안의 우리나라 민간어선 등으로 피난민 철수 작전을 감행했다.

흥남철수작전에 미국 해군함과 미국 상선, 일본 상선, 민간인 선박등이 동원되었지만 메르데스 빅토리호를 가장 감동적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라루 선장과 47명의 승무원의 헌신적인 인류애를 추모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진호에서는 중공군 56개 사단 498,000명과 200,000만 병력이 추가된 병력에 완전히 포위된 미 해병 1사단, 미 육군7사단 병력이 필사적으로 저항하면서 퇴로를 뚫고 있었다.

혹독한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면서 적들과 사투를 벌이던 미군 2개 사단 병력은 미 해병 사단장인 스미스 소장에 의해 퇴로를 확보하고 흥남으로 밀려온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미국 1 해병사단은 전,사상자 3,637명 비전투 전,사상자 3,657명을 기록했고 비전투사상자 대부분은 동상환자였다. 중국군 9병단은 장진호 전투로 무력화되었는데 10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전사 25,000명, 부상 12,5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흥남부두에는 미군과 한국군 10만여 명에 무기와 전쟁물자가 수송선을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피난민들이 끊임없이 흥남부두로 밀려오고 있었다.

군사작전에서 민간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에서의 현실이다. 최초에 민간인 단 3명도 태울 수 없다는 미군의 방침에 눈물로 호소하고 설득하고 또 "국군은 걸어서 철수 할 것이니 민간인들을 태우라"고 한 김백일 장군의 진정한 호소에 아몬드 중장은 민간인 철수를 결정한다.

 

흥남철수작전에는 영웅이 많았다. 현봉학 박사는 '한국판 쉰들러'로 추앙받고 김백일 장군은 피난민의 철수를 도운 일등공신이었다. 다음해 3월 김백일 장군은 제8군 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친 뒤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기를 탔다가 강원도 평창의 발왕산에 충돌하여 그만 순국했다.

34세의 피끓는 청춘을 조국에 바쳤다. "배에 실려있는 무기와 연료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최대한 태우라"고 한 메르데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 1등 항해사 러니, 아몬드 장군, 참모였던 포니대령, 미 제7 해병연대 대대장인 레이 데이비스 중령, 군단장 부관인 헤이그대위, 국군 제1군단 참모로 활약하던 광복군 지휘관 출신의 박시창 대령 또한 이들을 도운 뒤 거제도에 안착해서 생활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김백일 장군의 민사참모였던 유원식 소령도 있었다.

또 흥남부두까지 퇴로를 확보한 미국해병 1사단의 스미스 사단장과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준 당시 함경북도 문준희 지사, 또 6.25 참전 종군기자로 흥남철수작전을 직접 체험하면서 생생하게 현장의 소식을 보도한 한영섭 기자가 있다.

흥남철수작전의 백미는 12월 24일 14시 30분 마지막 엄호부대와 폭파요원들이 해안을 떠나면서 흥남항은 굉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미처 철수하지 못한 전투 물자들과 항만시설을 공산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하였던 것인데 이로서 한 많은 흥남철수작전은 완료되었다.

이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4일이었고 바로 다음날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하였다. 자유를 향한 엑소더스, 장엄한 스팩타클의 역사의 한 페이지. 전사(戰史)는 이 날의 철수작전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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