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진정한 왕건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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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진정한 왕건은 누구?
  • 동두천.연천신문
  • 승인 2015.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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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호현 문예샘터 문학분과장, 광릉21포럼(cafe.daum.net/k255) 대표

요즘 신문과 방송 등에는 차기 대선주자들의 기사 등으로 가득하다. 특히 ‘왕건’은 지난 1997년 신한국당 경선과 대선과정 이후 국민통합 지도자론의 본보기이며 민족사 구원의 지도자의 표상을 연상시킨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들 한다. 영웅을 찾아야 하는 이 시대에 역사는 우리 시대와 이 시대의 인물들을 평가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다. 《섬으로 흐르는 역사 (김영회 지음․동문선)》는 신라 말 신안군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세력들이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사의 중흥을 이끌어 낸 중심세력이었음을 고증을 통해 세밀하게 규명하고 있다.

이 책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시대의 역사 흐름과 현재의 정국이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주도세력의 등장과 다음은 누가 정권을 창출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신라 말 장보고 대사의 전통과 피를 물려받은 서남해안 해상세력은 고구려 주몽태왕의 기질을 이어가며 경기북부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다.
그리고 그후 왕건 태왕은 통일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서남해안지역 출신의 왕자인 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후삼국 시대와 매우 비슷하다. 신라가 일부 권력층의 독단과 전횡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 가운데 수년 동안 가뭄이 지속돼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급기야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형성하여 국가를 세움으로써 후삼국 구도가 형성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권력집중의 폐해와 정치리더쉽 지체현상과 정치 갈등의 산물로 지난 세기말에 IMF 경제 위기가 초래되어 국민의 삶이 피폐해져 거리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양산되었으며 도처에는 크고 작은 노동자 파업이 일어왔다. 또한 최근에는 남북 간은 제쳐놓고라도 대한민국 사회내부에서도 지역․세대․계층간 갈등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후삼국 구도 형성 후 독자적 세력을 키우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던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데, 그가 바로 왕건이다.
왕건은 개성의 호족 출신이었으나 궁예 휘하에 들어가 공을 세운 덕분에 태봉의 제 2인자로 성장했다. 궁예의 휘하에서 20년간 종사하면서 궁예의 통치에 대한 반성과 교훈을 얻으며 경륜을 쌓았다.
그 당시 호남세력 못지않게 새로운 왕건 시대를 여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지역이 지금의 양주시와 의정부시 등을 비롯한 경기동북부지역이다.

왕건이 궁예 휘하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인내와 양보이다. 궁예의 급진적 전제 정치와 이상 사회 구현이 호족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궁예가 말년에 보인 극단적인 카리스마적 권위에 대한 반발에 대해서 느낀바 컸던 것이다. 그래서 왕건에게는 자신의 것을 최대한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이 있었다.
[중폐비사]와 [추민유도]로 표현되는 그의 대호족 및 대민 정책의 기본 정신은 양보였다. 인내와 양보를 통해 서로 하나가 되는 방향을 택한 것이다. 이처럼 왕건은 당시 실세였던 호족 출신으로서 인내와 양보를 바탕으로 한 융화를 내세워 통일 기반으로 삼았다.

이렇게 국가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룬 다음, 국가를 새로운 발전으로 이끌었다.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모토로 건국해 국민통합의 정치를 바탕으로 폐쇄적인 구질서를 배제해 나가며 국민생활을 개혁하고 세제을 개편했다.
역사 속에 왕건의 건국이념과 국가경영전략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단지 고구려를 계승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왕건은 고구려라는 이름만을 계승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그보다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의 건국이념 “홍익인간”과 국가경영전략인 “통합, 서비스, 신뢰의 정책 집행과 결정”이었을 것이다.
또한 주몽태왕과 광개토태왕의 통치철학인 “위자안지(危者安之) 위태로운 사람을 안녕케 한다.”는 뜻으로 나라를 다스리거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국민이나 무리를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계승했다.
고구려에서는 문무를 비롯한 계층의 차별과 지역적 차별이 없었다. 특히 태왕이나 태왕족이라 할지라도 창칼을 들고 국가의 간성구실을 하는 것을 오히려 보람으로 여겼다.
태왕과 귀족들이 앞장서서 병사와 더불어 산야를 누비며 침략군을 막았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보다 엄격하고 충실했다.

고구려가 추구한 부국강병책의 본질은 부국안민책과 정전제(井田制)의 강화였다. 즉, 개개인의 백성을 부하게 함으로서 나라를 부하게 하고, 백성 개개인의 안위를 도모해 줌으로서 나라의 안위를 꾀했다.
이처럼 백성이 따를 수 있는 고구려 지도층의 수준 높은 신뢰의 리더십과 강력한 통합의 리더십에 기초하여 정전제로 대변되는 대민 서비스의 정책으로 백성들의 자발성을 이끌어 내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바로 고려 태조 신성황제(연천의 숭의전 위패에는 분명하게 신성황제로 쓰여 있음) 왕건이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우리 시대가 바라는 “선진통일한국 건설을 위한 국민통합의 정치”, “합리적인 경영마인드에 기초한 대국민 서비스의 정치”, “검증받은 경험과 경륜을 바탕으로 국민이 예측할 수 있는 신뢰의 정치”를 펼칠 진정한 우리 시대의 왕건은 누구인가? 그리고 서남해안 정치세력이 옹립하고 영남정치세력이 따를 수 있는 왕건과 같은 국가통합, 국민통합의 정치지도자는 누구인가? 이제 영남과 호남, 충청에서부터 지역갈등에서 초연한 왕건 태왕과 같은 지도자가 나서서 지역할거 갈등구도를 거중조정하고 타파하여 국가통합과 국민통합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역사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도 왕건의 집권 과정을 담은 많은 설화가 경기도 포천시 등에 남아 있는 것이 증명하듯 당시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인 힘은 경기동북부지역의 민심이었다.
더욱이 대한민국도 선진화와 민족의 통일을 이루고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함께 고민하고 주도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 ‘동사’의 저자 미수 허목 선생님께서 말갈사를 국사로 인식하고 ‘발해고’의 저자로 포천 현감이었던 유득공 선생이 대진국 고려(발해)의 역사를 찾아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했던 것처럼 우리의 역사, 문화와 정신적 가치에 대해 온 국민이 자부와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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