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수복과 함께 우리가 되찾은 것
상태바
서울수복과 함께 우리가 되찾은 것
  • 동두천.연천신문
  • 승인 2015.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제호 의정부보훈지청 선양담당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빼앗겼던 서울을 3개월 만에 되찾았다. 1950년 당시 서울은 15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605㎢의 면적을 관할하는 대한민국의 수도였다.
이를 수복한 이득을 수치화하면 대한민국 인구의 7.5%와 국토의 0.6% 회복 정도를 들 수 있다.
한 명의 국민과 한 치의 땅이라 할지라도 소중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남한의 전체 규모에 비해서는 큰 전과라 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9·28 수복을 피상적으로만 바라본 결과이며,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은 기계적 수치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무언가를 서울이라는 영토와 함께 되찾았다. 이에 아래에서는 9·28 수복에서 서울과 함께 우리가 되찾은 무언가에 대한 내용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선은 150만 서울시민이 공산의 폭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회복한 점을 9·28 수복에서 우리가 서울과 함께 되찾은 첫 번째로 들고자 한다. 북한이 남한 점령지역에 폭정을 행한 일은 익히 알려져 있음에도 서울에서의 북한의 학정은 특기할 만했다.
북한은 서울 점령 당일 자신들에 의해 전상을 입고 입원한 천여 명의 국군 부상병들을 학살했다. ‘서울대학교 부속병동 학살사건’으로 불리는 북한의 이 만행은 저항능력이 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복수를 자행한 ‘한반도판 Holocaust’라 할만 했다.
북한은 9·28 수복이 임박한 9월 중순 이후에도 같은 이유로 수차례 비슷한 만행을 저질렀는데, 9·28 수복으로 서울시민은 공산치하에서 박탈당했던 생존의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314년 만에 경험한 수도함락의 치욕을 씻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점이다. 1394년 한양이 조선의 경사가 된 이래 수도가 적에게 피탈당한 것은 1950년이 세 번째였다.
특히 개전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사실은 군 지휘부는 물론 전 국민에게도 수치였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서 서울의 상징성은 남한 전역에 미치기에 전쟁에서 수도의 보위 여부는 장병의 사기 뿐 아니라 전 국민의 항전의지에도 큰 영향을 준다.
다행히도 비교적 단기간인 3개월 만에 서울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3세기만의 수치를 씻고, 아군의 사기를 고취하며, 흩어진 국민정신을 결집하여 반격의 정신적 기반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로는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여건을 얻은 점이다. 서울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여 전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이러한 서울을 되찾은 것은 서울 이남의 북한군의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야기했고, 이들에 대한 전후방 포위공격을 가능케하여 38선의 신속한 회복을 가능케 해주었다. 서울 수복의 탄력은 통일을 위한 북진으로도 이어져, 38선 돌파 26일 만에 압록강에 도달하는 등 조국통일에 근접한 순간을 만들기도 했다.

9·28 서울수복을 37개월간 한반도 전역에 걸쳐 지속된 영토 쟁탈전의 일부로 본다면 9·28 수복은 대한민국 영토의 0.6%를 회복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의의를 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북한이 서울에 자행한 폭정과 서울의 수도로서의 상징성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서울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은 9·28 수복에서 605㎢의 국토 회복 이상의 것을 얻어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북한의 학살에 시달리던 서울시민은 생존권을 되찾았고, 수도함락의 치욕을 씻어 아군의 사기를 고양할 수 있었으며, 전세를 역전시킬 실질적 기반을 우리는 9·28 수복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서울수복은 인천상륙 작전의 승세를 아군 전체에게 확산시켜, 향후의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기반이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